10.06.11 작성
감독 :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 미후네 토시로,쿄 마치코
영화를 고르는 순간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했다. 명작의 반열에 올라 영화광들의 입방아에 항상 오르내리는 이 작품... 감독의 다른 작품인 <7인의 사무라이>도 역시나 뛰어난 작품성으로 호평을 받지만 내게 준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아 이 작품도 그러하지는 않을지 고민을 자아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순간 그러한 고민은 말끔히 사라졌다.
비 오는 날, 음산한 건물 안에 두 남자(승려와 나무꾼)이 있다. 그들 틈으로 한 사내가 끼어들자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아무리 세상사 통달한 승려라 한들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을 어찌 알겠소."
"세상이 온통 제앙뿐이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소"
그들이 털어놓는 대사다. 이 장면은 마지막 장면과 엮이면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만든다.
재판관 앞에서 사건에 대한 진술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주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최초 사건 발견자인 나무꾼의진술이 펼쳐진다. 그 장면 속에 대사는 없다. 오로지 장면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러가지 카메라 각을 통해 현실감을 더해주는 이 장면은,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다. 철학은 우리의 삶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예술은 단지 보여준다. 보여주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산을 따라 걷는 그의 모습에서부터 이상한 징조를 발견하고 사건을 직시하는 순간까지의 긴 장면 묘사는 우리를 영화 내부로 유혹한다.
그제야 사건의 핵심인물(악당 다조마루, 한 여인과 그의 남편) 중 한 사람인 다조마루가 등장한다.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게 잡힌 다조마루. 그 사실에 발끈하며 항변하는 다조마루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하고 다혈질인 사내. 그는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 등장하는 푸가초프와 꼭 닮아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특징인 것 같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도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키며 그들의 성격을 보여준다.
다조마루와 여인, 그리고 죽은 남편의 진술이 재판관 앞에서 동일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둘러싼 그들의 진술은 모두 다르다.
먼저 다조마루의 진술부터 살펴보겠다.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있던 그의 앞으로 한 부부가 지나간다.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이 태양이 너무 눈부셔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투의 어처구니 없는 대사를 그는 변주하고 있다. 바람만 불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바람이 불어 드러난 여인의 모습은 그의 욕망을 자극시켰다는 것이다. 그 욕망은 여인을 탐하는 그의 눈길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여인이다. 그는 남편을 꾀어 깊은 산 속으로 이끌고 가 나무에 묶고 다시금 여인을 바라본다.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질투심을 자나애고, 나무에 묶인 남자를 아내에게 보여주어 능멸하고 싶어한다. 부인을 남편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 그의 면전에서 그녀를 겁탈하려 한다.여인은 격렬한 저항을 내비치나 그는 그 모습에서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나 결국은 겁탈당한다. 그 모습에 남편은 분노하고 여인은 다음 대사를 읊는다.
"당신이 죽든지 남편이 죽든지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해요. 두 남자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두 남자가 멋지게 싸우는 사이 여인은 달아난다. 다조마루는 그녀의 격렬함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결국은 다른 여자들과 다를바 없었기에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 후 숨어 지내다 발견된 여자의 진술이 펼쳐진다. 그녀의 진술이 시작되기 전 나무꾼은 다 거짓이며(그녀의 진술 가리킴), 인간이란 악한 존재기 때문에 결국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감독은 이러한 순간 순간의 간섭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증폭시키고,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그녀의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조마루가 자신을 욕보인 후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슬픔이 아닌 분노였다. 다조마루의 진술에서도 우리는 눈빛에 대해 언급했다. 감독은 비언어적인 표현에 상당한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화자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을 강조한다. 앞서 나는 감독이 무성영화에 대해 찬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집중된 관심사는 시각이다. 영상예술을 하는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실은 당연한 것이리라. 다시 그녀의 진술로 돌아가자. 그녀는 남편의 차가운 증오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의 밧줄을 풀어주고 자신을 죽이라고 애원한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그 순간 손에 쥐어진 단도는 남편의 몸 속에 꽂히게 된다. 그 후 수차례의 자살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지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 사건의 당사자인 남편. 이미 죽었기에 그의 진술은 무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다시 나무꾼은 그도 거짓말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스님은 죽은사람까지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나무꾼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불신을 내비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정직한 사람이 어디있소. 자기 죄는 잊고 거짓말을 하죠. 그 점이 편하니까."
도적은 아내를 범한 후 그녀를 위로하고 설득한다. 한번 더럽혀진 몸이 다시 깨끗해질 수는 없다며. 그러자 아내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든 좋으니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도적과 같이 내려가려는 순간 아내는 외친다.
"저 사람을 죽여주세요."
이 말은 남편은 물론 도적마저 충격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조마루는 그에게 묻는다. 아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다조마루의 이러한 태도는 아내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그에대한 용서를 자아냈다. 아내는 도망가고 도적은 자신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단도로 자결한다.
그 때 나무꾼은 그 남자는 단도가 아니라 장도에 찔려 죽었고, 따라서 그의 진술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든 상황을 들은 남자는(라쇼몽(羅生門)에서 승려와 나무꾼과 같이 있던) 당신은 모든걸 알고 있으면서 왜 관아에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무꾼은 휘말리기 싫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가 본 사실을 말한다.
그가 본건 사실 남자의 시체가 아니다. 나무에 묶인 남자와 그 아내, 그리고 다조마루였다. 그는 사건에 얽히기 싫어 남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거짓 보고한 것이다. 다조마루는 여자 앞에 꿇어앉아 그녀를 범한데 대해 용서를 빌었다.
"난 지금껏 악이 시키는대로 살아온 사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이미 널 가졌지만 더 갖고 싶다. 아내가 되어줘.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소. 만일 허락하지 않는다면 죽일 수 밖에."
그녀는 여자로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남자들끼리 결정하라는 말로 알아들은 다조마루는 남편을 풀어주고 결투를 벌이려고 한다. 그 때 남편은 두 사내에게 욕보인 주제에 자결은 못할망정 관조하고 있는 저런 여자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않다며 데려가라고 말한다. 다조마루는 그 말에 응한다. 그러자 그녀는 다조마루에게 외친다. 그가 지긋지긋한 생활의 해방구가 되어주리라 믿었건만 그도 별 수 없다고. 여자가 원하는 것은 결투를 통해 당당하게 여자를 차지하는 진정한 남자라고. 그리고 다조마루와 남편의 결투가 벌어진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던 멋있는 칼부림이 아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결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결국 다조마루는 남편을 죽이지만, 아내는 도망간다.
이번에는 나무꾼이 아니라, 그의 얘기를 듣던 남자가 말한다. 당신 말도 거짓이라고. 그러고는 어디론가 휑하니 가버린다. 승려와 나무꾼이 따라가보니 그곳에는 버려진 아기가 있었다. 그에게 치장된 장신구를 훔쳐가려는데 둘은 어찌 그리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낸다. 그는
"그럼 당신은 달라? 위증을 한 사람도 당신이잖아!"
라고 오히려 나무꾼을 몰아붙인다. 그렇다. 그가 사건에 얽매이기 싫어서 재판관에게 위증했다고 스스로 고백했는데, 그런자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그만이 고가의 장도와 단도를 취할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없다.
이번에는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을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세상사. 그러한 지옥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승려는 나무꾼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나무꾼이 아기를 달래고 있을 때, 그런 자에게 아기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불신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엄청난 대사 속을 ㅗ빨려들어간다.
"부끄러운건 바로 나요."
그 후 이어지는 승려의 대사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우리는 이제 자신의 죄를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연대감을 느끼게 되며 신뢰감이 싹튼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을 인정할 때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정죄하기보다는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감독은 한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을 종합해가며 점점 더 진실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의 진술은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모두가 거짓이다. 즉 우리는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아나가야만 하는 딜레마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다조마루는 악과 욕망의 화신, 즉 하나의 영웅이 되고자 한다. 자신에 대한 굉장한 무용담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이러한 점은 마지막에 여자를 포기하는 장면에서조차 부각된다. 그는 한 인간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격렬한 반항, 그리고 찰나의 모습이라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욕망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도 쉬웠던 것이다. 이러한 말을 통해 자신을 더욱 악한으로 보이게끔 한다.
여자는 정절이라고 하는 단어가 지닌 고결성을 잃어버리기 싫어한다. 그러하기에 실제로 그녀는 순결을 잃어버리고 싶지만 순결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잃어버리기는 싫어 거짓 진술로 이어진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죽음을 악당과의 싸움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자결이라고 하는 고귀한 모습으로 꾸며지기를 원한다. 심지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죽은 뒤에도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이러한 진술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꾼의 진술은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가 모든 사실을 명백시 진술할 경우 그는 단도와 장도의 행방을 밝혀야한다. 이로인해 발생할 금전적인 손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파렴치한 일을 묵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진술은 그들 내면 속에서 진실로 받아들인 채 이루어진다. 즉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르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도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를 통해 진정한 회개,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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