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다시 만년필을 집어든 것은 대학생때였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그냥 검정색 유성볼펜을 아무거나 집어다가 썼다. 그러다가 어릴적 아버지께 받은 만년필 생각이 났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도 가끔씩 집어들곤 했다. 물론 그것으로 노트 필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슈퍼로텍스"의 최대 단점은 내구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년필 청소도 하지 않았고, 피스톤필러와 뚜껑을 너무 꽉 조았다. 사실 부서진 것이 그리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께 받았던 선물이 망가지니 마음 한켠이 굉장히 불편했다. 아무튼 내가 만년필을 다시 집어들기 시작한건 그때였는데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군대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왜 만년필을 쓰는걸까? 사실 만년필을 쓰려면, 세척해야지, 잉크도 알아봐야하지, 종이도 가려서 써야지, 수정테이프 위에는 못쓰지, 물에 닿으면 쉽게 사라지지(안료 잉크는 보통 잘 쓰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이 함부러 쓰면 안되지... 이만저만 귀찮은게 아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필압을 빼고 써야해서 오래 글쓸 때 편하다, 나만의 펜을 만들 수 있다(내 필기 습관에 맞게 펜촉이 적응한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첫번째 이유는 이미 수성펜과 제트스트림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년필을 쓴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도 아니다. 사실 신기하게들 쳐다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기만족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다. 또한 나 자신을 규정하는 도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좋은 시계를 차고다니는 것과 같은 의미인듯 하다. 사실 전자시계가 더 싸고 편한데도 굳이 아날로그 시계를 차고, 더 부정확한데도 크로마토그래피 시계를 차는것처럼 말이다. 허세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무슨 물건이든 자기 경제력 이상으로 쓰는 것은 비판받을만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정도 선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낼 수 있는 물건 하나쯤 있다는 사실은 좋지 않은가?
여하튼 내가 써본 만년필들을 몇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영웅 - 319 : 파카51 짝퉁으로 중국에서 만드는 브랜드. 영웅 100은 괜찮다고 하는데 싼게 비지떡이라 그런가? 319는 별로다. 차라리 프레피를 사는게 낫다.
슈퍼로텍스 :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난다. 외관이 튼튼하지는 않다. 독일제고 제법 세필이다.
파이롯트 - 에르고그립, 세일러 - 하이에이스, 파이롯트 - 프레라 : 일제 만년필이다. 한번 세필 만년필을 써보고 싶어서 써봤다. 이 중에 추천을 하자면 프레라다.(가격이 제일 비싼만큼) 개인적으로 만년필을 사용할 때 굳이 세필을 써야하나 싶다. 잉크의 농담도 그렇고, 필감도 그렇고. 일제 만년필도 꽤 호평을 받는 펜들이 많으나 난 저가형만 써서 별로 만족을 못한건지도 모른다. 하이테크정도의 두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 F촉 이상(F촉도 얇다, M촉 정도가 적당한 듯)을 쓰는게 좋은 것 같다.
온라인 - 비전 : 개인적으로 라미의 사파리보다 좋다. 사파리보다 사각거리고 강성이며, 세필이다. 개인적으로 이것과 사파리/알스타는 뚜껑을 끼우고 쓰면 불편하다.(무게중심이 뒤로 쏠린다.)
라미 - 사파리/알스타 : 사파리는 저가형에서 아마 최고의 펜이라 손꼽히지 않나 싶다. 스틸닙이며(펜촉) 사각거린다고 하나, 스틸닙인 것을 감안하면 심한편은 아니다. 은색 닙보다는 검정색 닙이 더 부드럽다. 펜 색상이 다양해서 개인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알스타는 사파리와 외관도, 촉도 동일하다. 다만 사파리는 플라스틱 배럴, 알스타는 알루미늄 배럴이라 알스타가 조금 더 무겁고 고급스럽다.
파카 - 파카45 : 후드닙이라 잉크 마름이 적다. 나는 Made in USA의 XF Nib을 사용하는데, Made in UK의 F Nib은 매우 두껍다. 파카 만국기 수성펜을 생각하면 된다. 현재 단종된 상태이다. 외관도 클래식하고, 필감이나 무게중심 모두 나쁘지 않다. 뚜껑을 끼우고 쓰는게 편하다.
펠리칸 - m150 : 스틸닙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부드럽다. 손이 작은 사람은 쓰기 불편할 수 있다. 컨버터형식이 아니라 피스톤필러 방식인데, 슈퍼로텍스를 깨먹은 경험이 있어 불안하다. 외관은 레진이고 m150은 검정색만 나오는데, 전형적인 만년필 외관이며 예쁘다. 다만 요 몇년새 가격이 너무 올랐는데, 지금 가격은 터무니없는듯하다.
펠리칸 - m200 : m150의 표준사이즈 버전. 펜촉을 m400과 호환이 가능하다고하나 그럴거면 m400을 바로사겠다. 한때 고시생펜이라 불렸다. 마찬가지로 가격이 너무 올라서 비추.
워터맨 - 엑스퍼트 : 워터맨 만년필은 세필이다. 사각거리는 스틸닙의 필감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내가 써본 펜들 중 가장 고가다. 다만 내 손에는 크고 무거워 장시간 쓰기 불편했다.
파카 - 파카51(데미) : 만년필 역사상 최고라 손꼽히는 파카 51이다. 지금은 단종된지 오래됐다.(한 40년 된듯하다.) m150 을 편하게 사용한다면 사이즈는 데미가 적당한듯하다. 명성만큼 좋은 펜이나, 단종된지 오래되어 괜찮은 펜을 구하기 어렵다.
cf. 만년필 촉 두께 : EF(Extra Fine)(파카는 XF로 표기) - F(Fine) - M(Medium) 등으로 구별된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필기용으로 EF/F Nib이 적당하다.
실제 시필한 사진을 올려보겠다.
(파이롯트 프레라/온라인 비전/라미 사파리/라미 알스타/파카45/펠리칸 m150)
(파카 51 데미 X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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