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새벽이슬 원고입니다.
*스탕달 - 『적과 흑』을 읽고
소개할 작품은 너무도 유명한 작품인 스탕달의 ‘적과 흑’입니다. 작품을 접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를 하겠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남자 주인공 쥘리엥 소렐. 비록 목수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지만, 그 누구보다 야심으로 가득찬 인물이다. 수많은 귀족 부인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더 높은 권력을 갈구하는 그. 그러나 옛 여인, 드 레날 부인과의 사건으로 인해 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 소설의 제목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적(Red)과 흑(Black)이 각각 군인과 성직자를 의미한다고도 하죠.(붉은 군인의 제복, 검은 수도사들의 옷)
목수의 아들에서 가정교사가 된 쥘리앵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는 사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총명하기에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서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은 것이죠. 그러던 중 근위대의 위엄을 보고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그는 신학교 교장인 피라르 사제의 추천으로 드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됩니다.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에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되면 매번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잊어 매 순간 벌을 받으면서도, 왜 항상 하나님 곁을 떠나는 것일까’ 하는 것이죠. 이 작품을 읽을 때도 비슷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쥘리엥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했다면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을텐데. 왜 위험한 줄 알면서도 항상 더 높은 곳을 꿈꾸며 허욕을 부리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대답은 그 누구보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주제에 앞서 저는 “흑(Black)”에 먼저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신분상승의 한 방편으로 신앙을 ‘이용’한 쥘리엥의 모습을 말이죠.
이 장면을 볼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메스꺼웠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쥘리엥을 비판하기 전, 나 자신을 생각할 때에, 과연 제가 쥘리엥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2:1)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가운데 만물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며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구요. 그런데 나는 그 복의 개념을 ‘세상의 복’으로 한정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그 복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뒤따라오는 것임을 기억하지 못하고 단순히 복 주시는 하나님‘만’을 기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데 방편이 되는 한 수단으로서 여기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칸트는 심지어 인간이 인간을 바라볼 때도 수단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써 바라봐야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을 수단과 목적 두 가지로서 바라봐야한다는 말로서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볼 때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 바라봐야하는 것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을 수단으로서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뜻이라 여겨지는 것’을 향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갈구하지는 않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테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달라는 기도. 그러나 그 기도 가운데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지는 않은지요? 그리고 그러한 고백을 하는 현재의 나는 내 삶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보다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호수아조차도 넘어졌지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섣불리 공격하다 참패를 당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군사력을 믿고 전쟁을 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쥘리엥을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제 스스로의 삶의 문제로 눈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매 순간 돌아볼 때마다 삶의 어느 한 부분도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연단시켜나가기를, 완악한 내 뜻을 꺾기를 내려놓기를 기도하는 것을 내 삶의 푯대로 삼아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내가 선 줄로 생각할 때에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만 이런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에게 희망이 있는 까닭은 우리는 쥘리엥과는 달리 믿음이 있는 까닭이며 이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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