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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로마서 6~8장이 말하는 성화(로이드 존스)

출처 : 로이드존스 교리강좌 2권 - 21장

다양한 이론들과 가르침들 그리고 몇 가지 문제를 다루었으니 이제 성화에 대한 성경 교리를 적극적으로 주해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법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시 의문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어떤 말씀을 말합니까? 말씀 전체,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우리의 성화를 돕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본성과 인격에 대해 참되게 읽으면 성화가 촉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 죄에 대한 교리, 하나님의 율법, 징벌, 지옥의 심판에 대한 교리, 이 모든 것이 성화가 일어나는 데 필요한 진리이자 요점들입니다.

1. 로마서 6~8장의 개요
 이것이 완전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성경의 특정 부분이 성화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말 역시 옳습니다. 여러 모로 보아 그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이자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의 표준문구라고 부를 맣난 부분은 의심의 여지 없이 로마서 6~8장입니다. 성화가 여기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하지만 이 장들은 명확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물론 바울이 첫 다섯 장에서 칭의라는 위대한 교리를 다루고 나서 로마 교회의 몇몇 성도들이 그 교리로부터 잘못 추론해 낼 수도 있을 법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저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부터 잘못된 추론을 이끌어 내고는 그가 도덕률폐기론을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 칭의 교리가 당신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무엇을 하든 상관 없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장들을 썼습니다. 그는 이 주장을 혐오하며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물리쳐 버립니다.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로마서의 이 세 장을 개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한 번의 강으로 로마서의 6,7,8장을 완전히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처럼 개략적인 내용 정리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바울의 논지를 정확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의 논지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함을(그는 이처럼 강한 표현을 씁니다) 보여주려 합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그는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과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그것이 주제입니다. 실로 6,7,8장의 주제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려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논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칭의에서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런 추론을 이끌어 내는 사람을 향하여 그로서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통해 이 위대한 장들의 중대성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논지는 6장에서 진술하고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7장과 8장에서 이 논지를 더욱 상세하게 다룹니다. 8장이 새로운 원리를 소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전체 논지는 6장에 나와 있습니다. 7장과 8장은 단지 심화된 내용일 뿐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인이 6장과 7장에 머물러 있으면서 8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극도로 위험한 오류입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8장 5~9절에서 제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진술을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8장에서 바울은 뭔가 이차적 복을 받은 일부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하나하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당신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육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그들은 육신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심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그리스도인도 이런 상태일 리 없습니다. 거듭나고 중생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중대한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차적 복이나 추가적인 체험을 한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6장에서 이미 말했던 것을 다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중대한 기초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강의에서 살펴본 것들을 참고하면 사람들이 성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 5~9절은 분명 이 문제를 영단번에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필연적으로 영적입니다. 거듭난 순간 우리는 신령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입니다.

2. 로마서 6~8장의 내용 분석
 전체 가르침을 요약하기 위해 개관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좀더 자세히 들어가보도록 합시다. 이 세 장에서 성화에 대한 바울의 논지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답하려면 우리는 다시 뒤로 돌아가 죄의 교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5장 후반부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아담과 함께 타락했고, 아담의 죄의 모든 결과를 우리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사람들이 죄와 사탄의 지배와 주관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 강의에서 우리는 타락의 결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죄 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우리의 영으로 육신을 주관하는 대신, 우리의 삶 전체가 육신과 그것을 주관하는 죄 된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죄는 바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 타락 이전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조화로운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식욕, 성욕 등 모든 본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완전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본능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그들의 가장 고상한 관심사들을 이루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균형은 완전히 깨어졌고 사람들은 자기 육체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엡 2:3)에 지배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육욕의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존재 전체가 고통을 받아 혼란과 방종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의 후반부에서 이 사실을 장엄하게 진술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0절). 그러므로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은 어떤 종류의 구원입니까? 단지 죄사함만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아니오.”입니다. 6장의 초두에서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다음과같이 말하리라고 상상합니다. “오히려 잘됐어요. 우리 죄는 모두 그리스도가 처리했어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죄를 짓든 아무 상관이 없지요. 사실상 우리가 죄를 더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더 넘친다고 말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나의 죄가 사해진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안전해요. 어떻게 살아도 문제 없죠.”
 사도 바울은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적이고 완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6,7,8장의 위대한 구절들을 통해 그는 d ㅣ주제를 파헤치고 입증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대한 구절은 로마서 6장 14절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바울의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14절)라고 말합니다.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여러분을 주관하지 못할 것이며, 바울은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지 보여 줍니다. 근본 원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연합의 교리를 앞에서 다루었는데, 성화에 앞서 그 교리를 다루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5장 후반을 다시 읽어보면, 거기서 말하는 논지는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한 일의 모든 결과를 거두었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모든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두가지가 대응을 이룹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께 결합되었습니다. 우리는 몇몇 측면에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은 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도 봅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니면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사용된 말로 표현해 봅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오직 칭의만 되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비성경적인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아직 거룩함이 아니십니다. 그들은 앞으로 거기까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눌 수 없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연합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전부를 소유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 바울 자신은 다음과 같이 추론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고 장사되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여러분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그래서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 정죄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롬 6:2). 부정과거시제로 표현할 만큼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 죽음은 영단번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여러번 반복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절).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7절).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죄로부터 이미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호소의 형태로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자로 여길지어다”(11절).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은 죄가 우리와 더 이상 관계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 장에서 바울은 남편과 결혼했다가 그가 죽은 순간 자유케 된 여자에 대한 중요한 논증을 다룹니다. 6장에서는 이 사실을 주인에게 속한 종의 이야기로 논증합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지만 다른 주인이 와서 그 종을 사면 그는 첫 번째 주인이 아닌 두 번째 주인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 5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리고 8절에서도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현재 시제입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11절과 13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새로운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7장에서 사실상 “어떤 의미로 너희는 율법과 결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너희에 대하여 율법은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했으며 선하고 성화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근본 진술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완전히 무죄하고 온전하다는 말인가요? 그리스도께서 자아 전체에 대해 그렇게 하셨나요? 나는 이제 모든 모양과 형태의 죄를 전혀 짓지 않게 되었나요?”
 바울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내가 방금 말한 모든 내용은 우리의 영혼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 영혼은 이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영적인 존재로서의 나는 죄에 대해 죽었다. 나는 영단번에 죄와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내 육체는 그렇지 않다.” 무슨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내 영혼과 육체, 전 인격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순간 그리스도는 나의 영혼을 완전히 구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자아’입니다. 하지만 내 육체는 여전히 죄에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와의 관계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 육체는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우선 6장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 끝장났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지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절을 보십시오. 11절에서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어서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을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13절도 봅시다. “또한 너희 지체(즉 나의 본능과 나의 수족, 나의 재능들과 내 모든 것)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그래선 안 됩니다. 바울은 반대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19절에 최종 진술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의 영혼은 해방되고 구속되었지만 육신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6장의 증거입니다.
 이제 7장을 살펴봅시다. 바울은 16절에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말합니다. 17절에서는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구속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입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는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어서 23절을 보십시오. “내 지체 속에서(내 속에서가 아니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그 죄가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죄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지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은 논리적 결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상태다. 나는 구원받고 속량받았다. 그렇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육신 안에 있으며 육신은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어서 나를 끌어내리려 한다. 누가 나를 이 몸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내가 어떻게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 이것이 그의 질문입니다. 25절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것이 7장에 나오는 증거입니다.
 이제 8장에 나오는 증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 10절에 증거가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이 말은 육신(flesh)이 아니라 육체적 틀, 즉 소마(soma)를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는 방금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의 상태입니다. 이런 여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사랑 있는 것이니라.”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13절에서도 바울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가 거하는 장소인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
 8장의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을 요약하는 위대한 구절인 23절이 나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는 전체 피조물에 대한 언급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이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답이 있습니다)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인 나의 영은 이미 구속을 받았지만 내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구속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와 타락 때문에 나의 영혼과 몸은 몰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영혼을 이미 구원하셨고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양자 될 것, 곧 내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라고 여러분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절망적인 불행과 실패의 삶을 살 운명이란 말입니까? 그저 헛되이 분투하다가 비참함과 불행 속에 억눌려 있어야 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기 위해 당신 자신과 자신의 능력과 힘에만 의지한다면 저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 당신은 그런 운명이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칭의와 성화를 분리한다면 당신은 그런 운명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죄사함 이상의 것은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런 운명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수천번도 넘게 주는 대답은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25절의 위대한 진술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그 진술에 대해 자주 논란을 벌여 왔습니다. 이 본문은 전혀 구속받지 못한 사람을 묘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구속받았지만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사람을 묘사하는 것일까요? 이 본문의 전체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첫 부분에서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남편이 죽은, 그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자유를 갖게 된 여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으로 율법의 마침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결혼했으며, 율법과의 관계는 끝났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정말로 쓸모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율법 자체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여러분을 의롭게 하거나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율법을 수행하려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죄로부터 건짐 받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정말로 멸망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특유의 극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율법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지키고 싶다. 하지만 내 몸이 나를 끌어내리고, 내 몸에 남아있는 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이 전부라면 나는 실패자이고 곤고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그와 같지 않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는 자신의 질문에 즉각 대답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6장에서 그가 요약한 내용이 이 질문에 이미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그 곤고함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죄는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6장 14절에서 처음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가 이 말을 즐겨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7장 25절에서도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어서 8장 10~11절에서는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것은 재림 때에 있을 성도의 부활마니 아니라 이 죽을 몸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이미 진행중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구절입니까!
 15~17절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낙심하지 말하야 합니다. 피곤한 순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여러분을 반대하고 끊임없이 패배하고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마지막 결과는 확실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바울은 23절에서 마지막으로 반복합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일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감과 좌절감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투쟁은 헛되거나, 절망적이거나, 무기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위대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며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역사의 결과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이미 해방시키셨으며 우리의 몸까지도 해방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마지막에 우리 몸은 완전하게 해방될 것입니다.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빌립보서 2장 12~13절이 그 답을 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창조하십니다. 성령은 죄의 모든 더러움과 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가 정결함과 하나님의 생명을 열망하게 하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소원하는 것을 행할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또 어떤 일이 있습니까? 바울이 로마서 8장 14절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합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성령의 인도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어납니까?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성령은 우리를 여러 방식으로 인도하시지만 특히 진리를 통해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창시자이시며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셔서 그 진리를 이해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실 때, 우리는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듯이, 우리의 영혼은 이미 속량받았지만 몸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마저도 마지막에는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이 일이 일어날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줍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그는 우리에게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나는 더 이상 패배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승리자의 편에 섰다는 것과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6:12). 나는 이것이 지극히 정당한 호소라고 느끼며 그대로 실천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 너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는 “옳은 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나의 속량받지 못한 몸이 이전처럼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위대한 호소를 합니다. 나는 내가 장차 영광 받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나의 몸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이생에 있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않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행될 과정이 있습니다. 죄는 몸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이 완성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을 다시 인용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구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나의 이 몸이 모든 형태의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날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낮은 몸을 변화시켜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빌 3:21).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구속의 과정을 시작하셔서 나를 영적인 존재로 구속하시고 죄에 대하여 죽도록 만드신 날이 있듯이, 나의 몸도 마찬가지로 죄에 대하여 죽고,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완전하고 책망할 것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게 될 그런 날이 있습니다.
 요한은 바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지금이라고 했습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그 때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같이 되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분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역시도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이루어질 일이며, 이 일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전히 이생과 이 세상에 있으며 여전히 내 몸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이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 역시 스스로 해야합니다. 이 사람은 수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나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입니다(골 3:5). 그것이 논지입니다. 이 모든 진리,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그렇게 행하라는 권면을 받고 그 일을 행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3. 성화에 대한 고찰의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든지, 이생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이야기를 반드시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름으로 그런 말들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반작용의 원리 역시 거부합니다. 이 원리로는 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내가 영적으로 이미 해방되었으며, 문제는 오직 육신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로마서 7장에 머무르는 그리스도인과 8장에 도달한 그리스도인 사이에 잘못된 구분을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로마서 8장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화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계획의 일부로 봅니다. 그리스도는 구속이시며 신자는 그리스도께 연합합니다. 거듭남과 중생과 연합의 순간이 강력한 과정이 시작하여 최종적으로는 완전한 구속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과정은 심지어 우리의 몸, 즉 지금까지, 그리고 우리가 죽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 계속해서 죄의 지배 아래에 있을 우리의 몸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죄를 지배하고 점점 정복하게 될 것이며 그의 성화에 진보와 성장이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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