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싶은 건 말이야, 자기 전에 어떤 변명을 하길래 그렇게 넌 나쁜 놈이 아닌 척하며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거지?”
보이드는 레일런에게 ‘너도 나와 같은 범법자가 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종종 범죄자들을 총으로 죽이지만, 합법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보이드 그토록 그들을 죽이려 혈안이 된 네가 어떻게 나쁜 놈이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도덕과 법이 다르다는 것을 학창시절에 배웠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내용을 가지고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인 저를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 아버지를 믿음으로 은총을 입었으니, 이제는 제가 그 아버지의 사랑을 갚기 위해 헌신된 삶을 살겠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겠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고백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고백은 아버지께서 나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셔서 새로운 존재로 빚어주신 것에 대한 감격에서 나타난 것이겠죠.
그 다음에 고백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자로서 헌신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나, 그 고백을 하는 자의 생각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칭의(의롭다 여기심)와 성화(거룩하게 함)를 종종 얘기합니다. 칭의는 영 단번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나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주체자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쉽게 파악합니다. 성화를 얘기할 때는 조금 견해가 나뉩니다. 성화는 분명 나의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분명 나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거룩하게 빚으시는 주체자는 분명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와 유사한 딜레마에 놓여있습니다. 나는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실 자를 예정하셨고, 자신의 뜻 안에서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분명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가 있는 인격체이며, 나 스스로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주권자가 아니라고 해야 하거나, 나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야 하나요? R.C. 스프룰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부모-자식의 비유를 통해 얘기합니다. “인간의 가족을 통해서 유추할 때 나에게도 자유로운 의지가 있고 자녀에게도 자유로운 의지가 있다. 이 의지가 충돌할 때, 자녀의 의지를 나는 통제하는 권위가 있다.” 또한 벌코프는 “세계 안에는 자연세력이나 인간 의지와 같은 원인들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고무하시며 매순간마다 동행하시며 또한 이 행동을 효과 있게 하신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한 부분을, 인간이 다른 한 부분을 분담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의 모든 창조물과 합력하시며 그들의 일을 정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선을 위하여 악을 제압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성화의 문제로 돌아올 때 위의 원리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 스스로 성도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가고 있으십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스룹바벨은 1차 포로귀환의 지도자였습니다. 70년간 바벨론과 바사(페르시아)에 의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의 은혜 아래 많은 유대인들을 이끌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성전 재건을 B.C. 535년에 시작했으나, 주변 국가의 견제와 같은 방해로 15년간 중단되었습니다. 학개, 스가랴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한 것은 분명 이스라엘 자신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재건이 분명 이루어질 것이라 약속하시지만 그것은 오직 나의 영,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 말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인으로써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너무도 연약하기에 조금의 장애물만 있어도 쓰러지고 포기합니다. 그때 포기하여 다시 예전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순종하는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그 순간 내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하여 이끄시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결코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앞의 고백을 고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 질문에서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다짐 자체가 아닙니다. 다만 그 다짐에, 나를 이토록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니,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나 자신의 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을 번영케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모든 유럽의 군주들 위에 존재하는 교황으로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자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래의 질문인 기독교 윤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분명 세상의 윤리와 다릅니다. 세상의 윤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주목합니다. 얼마나 친절한가, 얼마나 이웃들을 잘 돕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보다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이렇게 둘러서 얘기한 까닭을 이제 얘기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의 레일런(보안관)과 같은 존재입니다. 세상의 악을 볼 때 분노가 끓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악을 향한 것을 넘어서 그 악한 자에게로 향합니다. 또한 법, 윤리라는 한계를 넘지 않도록 조율하며 보복을 계획합니다. 법과 윤리라는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까닭은 나 자신의 평판과 관련하여 나 자신을 숨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하는 가운데 이미 나의 마음은 그 악한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상의 악을 볼 때만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분노와 악이 존재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쳇바퀴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아무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짐해봤자 작심삼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더욱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위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변화는 눈에 보기에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변화되고 있으며, 변화될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이를 더욱 소망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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