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신사도운동가들의 견해를 밝히고 비판하는 순서로 글은 구성되어있다.
(1) 개방신학
- 교회성장 연구소의 크리스티안 슈바르츠가 이른바 ‘자연적 교회 성장’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보자. 여기서 슈바르츠가 내린 결론 중의 하나는 “정규 신학공부는 교회성장 및 교회의 전반적 자질과 음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매우 충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46쪽)
피터 와그너가 이러한 치우친 통계를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정통신학이 교회성장에 걸림이 된다는 주장을 말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러한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교인 숫자만 많으면 이단교회를 택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 이 책의 앞장에서 나는 와그너 리더쉽연구소에서 필수과목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나는 조직신학을 과목에 포함시킨 적이 없다. 그 이유는 현재 사역을 하고 있는 사도적인 성향의 학생들에게 이 과목은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76-177쪽)
피터 와그너의 주장은 정통신학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에 있다.
과연 WLI 출신의 신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이단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별조차 못할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목적은 숫자적인 부흥만 된다면 이단교리를 포함시키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을 나타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다.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78쪽)
피터 와그너는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성경과 다른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 목사들에게는 기록된 성경 외에도 얼마든지 다른 계시가 가능하며, 그들에게 신학이란 무가치하며, 그들이 곧 사도이며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 조셉 마테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주된 목적은 당신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죽으심의 주된 목적은 당신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죽으심의 주된 목적은 당신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 결과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함이다.” (도미니온, 81쪽)
신사도운동은 자신들이 이루는 지상천국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부정한다.
- 그러나 개방적 신론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면 어찌되었든 그 일은 일어나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가능성을 열어 놓으셔서 인간의 선택에 맡겨 놓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중략) 만일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어떤 일들을 인간의 결정에 맡기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지 그분이 미리 아신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게 보인다. (중략) 하나님은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열어 놓기로 결정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하나님 자신이 미리 알지 않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도미니온, 100쪽)
그의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참새 스스로의 선택이 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성경은 잘못 기록되었다고 하여야만 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9-31)
하나님이 장래 일을 섭리하지 않으시며 작정하지 않으신다면, 그래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대로 된다면 우리는 왜 그분에게 기도를 하고 그분의 긍휼하심을 간구하여야 하는가? 피터 와그너의 하나님은 섭리하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모르는 분으로서, 눈을 감고 계시는 분이며 졸고 계시는 분인가? 그렇다면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여야 하는가?(참조. 엡 1:4-5, 엡 1:11, 잠 16:9)
(2) 기독론의 문제 - 케노시스
- 예수님의 순종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이었으며 일시적인 순종이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자신의 신성을 사용하시는 것을(신성의 소유가 아니라) 전적으로 유보하셨다. 이것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사용하신 성품은 인성이셨음을 의미한다. (도미니온, 130쪽)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기독론에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신성을 포기하고 인성만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케노시스’라고 불리는 이단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이단성의 기독론을 신사도운동의 자칭 사도들이 주장하고 있다.
-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 가운데 계실 동안 자발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자신의 신적인 속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으로는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 복종하겠다는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은 그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기도는 전투다, 59-60쪽)
- 하나님은 우리가 예언의 메시지를 실증해 보이기를 원하신다.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예언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며 예언 사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화되어지기를 원하신다. (마이클 비클, 예언사역의 여정, 138쪽)
예수님이 신성을 포기하였다는 주장은 곧 사람도 성령의 능력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성령의 역사로 물 위를 걸어보아야만 한다.
위와같은 주장은 소위 ‘케노시스’라고 부르는 이단적인 주장으로서, ‘자기 비우심’은 예수의 신성이 감소된 것이나 신적 속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다. 형태의 변화는 있었지만 신적 속성이라는 본성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변화는 없었다. 예수님은 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신적 속성의 사용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분이 인성을 가지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사람과 동일한 존재,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9)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한계를 입으셨지만 신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신성이 조금이라도 박탈당했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실 수 없다.
(3) 삼위일체
-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와 예수님과 나는 늘 영원 동안 함께 있었어. 그런데 예수님이 아버지께 올라가시면서 나는 이 땅으로 왔어” 성령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그리워” 또 “그래서 정말로 많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정말로 예수님을 높이고 정말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략) 성령님은 예수님을 그리워했고, 또 아버지도 그리워 하셨습니다.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217쪽)
정통 신학적인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인격적인 구별이며 상호교류할 수 있는 관계성을 말한다. 위의 주장은 완전한 삼신론으로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그리워하며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 자체가 상호간의 영적교류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신사도운동의 자칭 사도들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무지한 자들인지를 여실히 말하여주고 있다. 특히 하나님을 공간에 제한시키는 주장으로, 온 세상에 충만히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 저는 이제야 실제적으로 삼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여호와 엘로힘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어쨌든 저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성령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러자 천사가 저를 쳐다보더군요. 천사의 눈을 보니 “이 친구 정신없구먼”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하나님, 곧 여호와 엘로힘 야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시 성령님은 땅 위에 계시잖아”, “어 그렇군요, 이제 알겠어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219쪽)
캐롤 하놋과 대화를 나눈 성령은 과연 누구였으며, 제시 듀플란티스와 대화를 나눈 천사는 누구인지 여러분은 그 정체를 알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께로 나오는 것을 보고, 죽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본 자가 성령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삼류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 베니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라는 카세트 테이프 시리즈물에서 자신이 예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곧 그리스도이다. 내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주장까지 한다. (빈야드운동 평가, 61쪽)
굳이 비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그리스도로 자청한다는 점에서 이단임을 쉽게 알 수 있다.
(4) 신사도운동 사도들의 정체
한국 WLI의 공식 사이트의 소개란에 따르면 “과거 신학교 교육이 과거 지향적이고 답습적이었다”며 “WLI는 전통적인 신학교 모델이나 안수 받기 위해 세워진 교육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다”rh 강조한다. 또한 “WLI의 훈련과정의 초점은 지식보다 은사의 전수(임파테이션)에 둔다” 며 “히브리어, 헬라어 습득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붉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의 삶 밖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서 수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도의 기술, 케네스 헤긴, 믿음의 말씀사, 12쪽)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며 장래 일을 미리 알고 예언을 할 수 있는 신사도운동의 자칭사도들은 하나님보다 능력이 있는 자들인가?
- “죄와 연약함, 질병과 영적 죽음, 가난, 이 모든 것은 한때 사단이 우리를 다스리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복으로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다스리는 방법들을 통치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스리는 시대입니다.”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부흥운동, 212쪽)
피터와그너와 같은 자칭사도들이 주장하는 도미니온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는 천국을 뜻한다. 그들이 보이는 기적과 표적과 치유는 그들이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을 뜻한다.
- (창 1:26-27인용하며) 그리하여 아담이 이 세상에서 땅위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담이 이 세상의 신이었습니다. (중략) 아담은 대반역을 저지르므로서 이 땅의 지배권을 사단에게 넘겨 주어 버렸습니다. (중략) 사단은 권세를 가지고 아담의 임대차 기한이 다할 때까지 계속 이 세상의 신으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법적으로 개입하셔서 마귀로부터 이 다스림을 빼앗으실 수 없습니다. 이 땅은 마귀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아담으로부터 빌렸기 때문에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께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케네스 헤긴, 기도의 기술, 13-14쪽)
케네스 헤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며, 아담이 사단에게 통치권을 임대하였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9)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6-28)
아담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생물”을 다스리라는 내용이다. 게다가 아담이 세상의 신이었다는 주장은 황당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단이 지구 위의 생물들을 다스리는가? 아니다 참새 한 마리를 포함하는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
또 그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라는 구절이 기도를 구별하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오히려 기도를 구별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는 믿음의 기도, 헌신의 기도, 결단의 기도 등으로 분류를 하고 있는데 그 기도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앞에 수식되는 단어가 포함되어 다르게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기도의 종류에 동의할 수 없다. “믿음의 기도”와 “성령 안에서 기도”가 다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라면 어떤 기도는 “성령 밖에서 기도”인가?
더욱이 케네스 헤긴은 “믿음의 기도를 할 때에 ‘만익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마무리하는 기도는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응답받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케네스 헤긴은 자신의 기도를 정의하고 기도를 만들고 있다.
그가 만드는 이상한 기도와 이상한 성경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새영어성경을 인용하여 롬 8:6을 “우리가 발음할 수 없는 신음을 통해 성령님 스스로 우리를 간구하신다”로 해석을 한다. 그리고 “신음으로 하는 기도”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성령께서 도와주는 기도라고 언급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6-7)
다른 한글 번역성경은 모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은 우리를 위하는 성령의 중보사역을 뜻하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어려움과 고난을 갖고 기도할 때에 우리 마음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케네스 헤긴은 본문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성령의 기도는 신음으로 하는 기도라는 이상한 기도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성경의 본질을 무시하고 이상한 해석으로 인하여 외적인 현상에 치중하는 기도를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성령의 기도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사도 운동의 정체이다.
-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중보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하면 마치 당신 자신이 잃어버린 영혼인 것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중보하는 사람이 잃어버린 영혼이라면 당신도 똑같이 잃어버린 자처럼 느낍니다. (중략) 나는 피닉스에서 그 금요일 밤에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며 방언으로 한시간 가량 기도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영혼 누군가를 위해 중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리의 신호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승리의 싸인이란 것은 부담감이 사라지고 가벼워진 기분과 상쾌하고 복받은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당신이 방언으로 노래하기 시작할 때나 신음 대신 웃기 시작할 때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기도하던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기술, 136-137쪽)
물론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에 그 기도의 대상이 나인 것과 같은 느낌으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중보의 영이 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데 ‘중보의 영’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더욱이 눈물과 방언과 신음으로 한시간을 중보기도하면서 그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케네스 헤긴은 신음으로 기도를 하면 성령의 기도이며 웃음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도의 승리가 이러한 감정적 느낌의 표현이라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5) 신사도운동의 성경관
- 전 세계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그 책을 숭배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또 성경 하나님을 섬깁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령 하나님으 ㅣ자리에 그 책을 갖다 놓았습니다.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214쪽)
성경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대상과 목적이 아니라 신앙의 기준과 방법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숭배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즉, 성경이 삼위일체라는 비난은 ‘오직 성경’을 비난하고 부정하는 견해가 된다. 신사도 운동은 직통계시와 예언을 주장하며 그들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